[AP신문=하민지 기자] 제목과 부제목이 좀 도발적인가요. 하지만 제가 지난 12월 12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조국 보도를 되돌아보다' 세미나에서 느낀 그대로를 썼습니다.

세미나에는 권석천 중앙일보 논설위원, 모 대학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언론사 입사 시험을 준비하는 대학생 등 세 분이 발제자로 나섰습니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교수님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 사태 관련 보도를 분석했다기보다는 음모론 같은 걸 제기하더군요. 분단 체제를 유지해 이를 이용하려는 보수 단체들이 보수 언론을 만들고 그 뒤에는 미국 커넥션이 있다는 식입니다.

교수님은 이런 보수 언론들이 조국은 악마화하고 반문 진영 인사들은 천사화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런 보도들이 보수 단체를 추동했고, 고무된 보수 단체들은 체제 투쟁을 선언해 '담론 전쟁'이라는 내전이 펼쳐졌다고 설명합니다.

조국 전 장관 관련 보도를 되돌아보는 세미나인데 발제 논점이 엇나간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문제적이라고 말하는 타깃이 누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보수 단체인지? 보수 언론인지? 보수 진영 인물들인지? 타깃이 누구든 이 발제 내용이 조국 전 장관 사태 관련 보도를 성찰한다는 주제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어리둥절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뭐가 문제라는 건지 잘 모르겠으나 해결방안을 제시하긴 했습니다. 첫째는 정부가 이 발제에서 언급된 언론사들에 혈세를 쏟지 말아야 하고, 둘째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언론인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고 하네요.

셋째로 진보 진영도 고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진보 언론은 분단 문제, 동북아 미래 등을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페미니즘 이야기를 합니다.

'페미니즘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 이슈로 인해 다른 중요한 국가적 과제가 묻혀도 좋은 것 아니지 않을까 싶다.'

여쭤보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습니다.

1. 페미니즘 때문에 다른 과제가 묻힌 것이 맞습니까?
2. 페미니즘이 이야기하는 문제는 '국가적 과제'가 아닙니까?
3. 페미니즘은 '이슈'입니까?

제가 먼저 답하겠습니다.

1. 페미니즘은 다른 과제를 묻지 않았습니다.

국내 언론 중 한겨레를 기준으로 기사 수를 살펴 보겠습니다. 교수님이 발제에서 한겨레는 '평화 통일을 오매불망 기다렸던 분들이 피땀으로 만든 언론사'이니 페미니즘 '이슈'에 조금 덜 집중하고, '분단 문제, 남북 관계, 한미동맹, 동북아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콕 집어 이야기했으니까요.

국내 언론이 페미니즘, 여성 인권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한 건 2015년부터입니다. 그 해에 '메갈리아'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015년부터 기사 수를 세어 보겠습니다.

2015년 1월 1일부터 오늘인 2019년 12월 13일까지 기간을 설정하고 '페미니즘'이라고 검색했을 때 나오는 기사 수는 960건입니다. '분단'은 2260건, '남북'은 10423건, '한미동맹'은 702건, '동북아'는 2195건입니다.

물론 키워드 검색만으로 한겨레가 '분단 문제, 남북 관계, 한미동맹, 동북아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했는지 안 했는지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이 이야기한 키워드로 검색된 기사 수를 다 합치면 15580건입니다. 페미니즘 기사 수의 약 16배입니다.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고 양으로만 봐도 페미니즘은 다른 국가적 과제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페미니즘 관련 기사가 다른 국가적 과제를 묻는다고 해도 그건 나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2.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하는 여성 문제도 국가적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올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3.5일에 1명이 친밀한 남성이 가한 폭력으로 살해됐습니다. 살인미수, 살인미수급 폭력으로 위험에 처한 경우까지 합하면 1.8일에 1명씩 피해자가 발생했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82년생 김지영'도 현실입니다. 통계청이 지난 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기혼 여성 중 약 20%가 올해 경력이 단절됐습니다. 이 중 절반은 30대입니다. 

경력단절 사유는 육아가 38.2%로 가장 많습니다. 다음으로는 결혼이 30.7%, 임신·출산 22.6%, 가족 돌봄 4.4%, 자녀 교육 4.1%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국가가 해 줘야 하는 돌봄 서비스 등 사회 복지의 영역을 젊은 여성들이 메워왔다는 뜻입니다. 그사이 남성은 경력을 쌓고, 승진하고, 여러 요직에 진출했습니다.

교수님 취업 준비하신 적 있습니까? 저는 몇 년 전 모 방송국에서 면접을 봤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방송국입니다. 

거기서 면접 보는데 면접관이 그러더군요. 당신이 마음에 드는데 나이가 많아서 결혼과 육아로 일을 쉴까 봐 걱정이 된다고요. 

제가 마음에 든다는 한 마디에 기뻐서 뽑아만 주신다면 회사에 헌신하겠다고 읍소했습니다.

면접관이 한 번 더 묻더군요. 다들 면접 땐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막상 뽑아놓으면 육아 휴직한다고요. 조금 더 자신들에게 (일을 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달라고요. 그때 제 나이 고작 27살이었습니다.

국민의 목숨이 이틀에 한 번꼴로 위태로워지고, 국가가 해야 하는 복지의 영역을 국민이 대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성도 국민입니다. 국민인 여성이 겪는 문제 또한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국가적 문제입니다. 

3. 페미니즘은 '이슈'가 아닙니다. 젠더 '문제'이자 여성이 겪는 '문제'입니다.

'이슈'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검색하면 '쟁점(서로 다투는 중심이 되는 점)'이라고 나옵니다. '서로 다'툰다는 표현을 잘 들여다 봅시다. 무언가를 두고 다투려면 양측이 각자의 입장을 가지고 부딪혀야 합니다.

공공기관, 언론 등 많은 곳에서 '젠더 갈등', '남녀 갈등', '페미니즘 이슈' 등의 표현을 쓰곤 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각자의 입장을 가지고 부딪히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여성이 겪는 현실의 문제를 똑바로 보지 않은 채 '논란거리', '양측의 입장이 팽팽해 정답이 딱히 없는 것' 정도로 축소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겪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문제들은 말 그대로 '문제'이지 '이슈'가 아닙니다.

조국 전 장관 사태 보도의 문제점을 짚어보는 세미나에 가서 '페미니즘 때문에 다른 과제 묻힌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연예인 성범죄 기사가 떴을 때 다른 '정치적 문제' 묻힌다고 주장하는 일부 누리꾼들의 의견과 다른 게 없는 음모론급 주장을 학자가 하다니요.

실망이 큰 상태에서 발제 후 토론이 시작됐습니다. 모 언론사에서 20년 넘게 근무하고 지금은 강단에 있다는 분이 객석에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그 분도 이상한 말을 하더군요. 발제자로 나선 대학생에게, 언론사 입사를 희망한다면서 모 방송국 보도본부장을 국장으로 부른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학생을 훈계했습니다.

지금은 강단에 있으니 교수님이라고 불러야겠죠. 교수님, 그 학생은 언론사 입사를 희망하는 사람이지 입사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은 독자고 시청자입니다. 보도본부장이든 국장이든 독자·시청자가 꼭 알아야 합니까? 

조직 외부의 사람이 언론사 입사를 희망한다고, 그 사람에게까지 그런 위계 질서를 따를 것을 고수하고 정확한 직함으로 부르기를 명령해 얻는 게 무엇입니까? 조직 외부의 사람에게까지 그러는데 조직 내부는 어떨까요. 

어디든 수직적인 조직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시대를 잘 따라가셔야 합니다.

교수님, 기억하세요. 독자·시청자에게 언론사 조직 내 상층부에 계신 분들은 그냥 동네 아저씨입니다. 

갑갑합니다. 페미니즘이 다른 국가적 과제를 묻는다는 언론학계 교수, 언론사 시험 준비하는 학생에게까지 언론사 내 위계 질서를 강요하는 전직 언론인.

세미나장을 나서며 '보고 배울 만한 선배가 어디 계신가'라는 생각이 들어 허탈했습니다.

페미니즘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중년 남성의 모습을 그만 보고 싶습니다. 언론사 선배에게 막말을 들었다고, 또 남성만 뽑혔다고 엉엉 우는 친구의 전화를 그만 받고 싶습니다. "스터디 하나 더 하는 것보다 남성으로 성 전환하는 게 (언론사 입사하기에) 빠르겠다"는 말들도 그만 듣고 싶습니다. "성적 순대로 뽑으면 남성은 다 떨어져야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남성 지원자들을 위로 올렸다"는 뒷말들도 그만 듣고 싶습니다.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젊은 기자인 우리가 보고 배우고 존경할 수 있는 선배가 절실합니다. 어디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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