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소리 디자이너 김벌래. 사진 OBS경인TV '명불허전' 캡처

[AP신문=하민지 기자] 펩시 콜라 병뚜껑 따는 소리를 콘돔으로 만들고 펩시 본사로부터 백지수표를 받았다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 김벌래. 지난 21일은 그의 기일이다. 그는 재작년 5월 21일에 별세했다.

그의 직업은 '광고 소리 디자이너'다. 그의 손과 귀를 거쳐 간 광고만 2만여 편이다. 펩시 콜라부터 소리 없는 광고의 원조인 보령제약 용각산, 배우 이덕화가 문을 '쾅'하고 세게 내리치는 트라이, 종근당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종소리 모두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광고 소리 디자이너로서의 그의 역사는 한국 방송의 역사, 상업 광고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TV 광고는 1956년, 라디오 광고는 1959년에 처음 등장했다. 방송국이 세워지자마자 광고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방송국 개국을 상업 광고 역사의 시작이라 봐도 무방하다. 

김벌래가 유명한 펩시 광고 소리를 만든 건 1960년이다. 앞서 설명했듯 상업 광고가 195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졌고, 김벌래는 1960년부터 활동했으니 광고의 역사가 곧 김벌래 소리의 역사다.

김벌래는 특수 음향 효과가 없던 시절, 발품을 팔아 여러 재료를 사고, 바람이나 물을 넣어보기도 하고, 화약에 못을 박아 터뜨려 보기도 하는 등 여러 실험을 반복하며 광고 음향을 창조했다. 

지금은 기술이 발달하고 광고의 형태와 장르가 다양해지면서 김벌래처럼 세상 모든 사물을 매만져 소리 내고, 녹음 필름을 가위로 잘라다 붙이는 광고인은 거의 없다. 

광고 소리의 역사를 이어가는 광고인은 제품을 두드리거나 음식 먹는 소리를 부각하는 등 ASMR(자율 감각 쾌감 반응)을 광고에 접목하거나 중독성 있는 CM송을 만들며 광고를 하나의 콘텐츠로 제작하고 있다.

광고 소리의 역사 그 자체이자 어쩌면 ASMR을 접목한 광고의 원조인 김벌래의 소리들. 하나하나 만나보자.

60ㆍ70년대 ASMR 광고, 펩시와 용각산

김벌래는 광고 소리 디자이너로 일하며 대학 교수로 강단에 서고 여러 방송에 출연했다. 사진 tvN

병뚜껑은 쇠다. 병뚜껑을 따면 쇠가 휜다. 우리 귀에 잘 안 들려서 그렇지 분명히 쇠가 휘는 소리가 난다. 실제 나는 소리라 하더라도 광고에서는 제품의 장점만 극대화된다. 시원하고 맛있는 콜라 광고에서 쇠 휘는 소리는 굳이 필요 없다.

1960년, 김벌래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마시면 상쾌하고 기분 좋은 펩시 콜라 광고 소리"를 만들어 달라는 것. 애초에 광고주의 요구 자체가 추상적이었다. 김벌래는 난해한 시에 해석의 살을 붙이는 비평가처럼 상쾌하고 기분 좋은 소리의 실체를 찾아 나섰다.

콜라 딸 때 나는 소리를 고무풍선을 터뜨려 표현해 보다 실패했다. 고민 끝에 풍선보다 질긴 콘돔을 찾아 나섰다. 마침 당시 유신정권은 산아제한 정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콘돔을 공짜로 나눠주고 있었다. 김벌래는 구청에 가서 콘돔 100개를 공짜로 얻어왔다.

펩시 소리는 이렇게 탄생했다. 콘돔을 터트린 소리는 병뚜껑 따는 소리가, 콘돔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는 탄산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됐다. 전자는 '펩', 후자는 '시'로 형상화됐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콜라 ASMR 광고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1975년에 공개된 보령제약 용각산 광고는 ASMR 광고이면서도 소리 없는 광고의 원조다. 광고는 용각산이 미세한 분말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흔들었을 때 소리가 안 난다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타사 제품을 흔들었을 때 나는 알약 소리는 깡통과 모래, 자갈로 만들었다. 깡통에 모래와 자갈을 넣고 흔들어 만든 소리다. 용각산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아무 소리도 넣지 않았다. 

침묵마저 소리로 만든 김벌래. 광고에서 아무 소리를 안 낸다는 것은 당시로선 과감한 시도이자 창의적인 발상이었다. 

세상에 없는 소리, 브렌닥스와 금성사

김벌래는 세상에 없는 소리도 만들었다. 첫 번째는 1985년 부광약품 치약 브랜드 브렌닥스 광고다. 광고는 브렌닥스 치약이 플라크(치태)를 없애준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생각했다. '이가 깨끗하게 잘 닦이면 무슨 소리가 날까?' 사실 아무 소리 안 나겠지만 그는 '뽀드득' 소리를 떠올렸다. 막 설거지한 그릇, 잘 닦은 식탁에서 나는 '뽀드득' 소리를 치아에 접목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풍선에서 소리를 찾았다. 손끝에 물을 묻혀 풍선을 문질러, 혓바닥이 깨끗한 앞니를 훑을 때 나는 소리를 표현해 냈다.

광고 속 깨끗한 치아 소리가 얼마나 유명했는지, 소비자는 브랜드 이름은 잊고 '뽀드득' 소리만 기억하기도 했다.

1985년 금성사 광고에서는 리모컨 광선 소리를 만들었다. 리모컨을 누르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광선도 발사되지 않는다.

김벌래는 리모컨 광선이 발사되는 소리를 성냥으로 만들었다. 팔각으로 된 유엔 성냥에 성냥개비 서너 개를 한꺼번에 그었다.

이 광고도 화제가 됐는데 뜻밖의 환불ㆍ교환 논란이 벌어졌다. 리모컨을 샀는데 광선도 안 나오고 소리도 안 난다는 이유에서다.

브랜드 시그니처 사운드, 종근당과 트라이

시그니처 사운드라는 게 있다. 가수 박진영(JYP엔터테인먼트)이 자신이 만든 노래 앞에 속삭이듯이 "제이와이피(JYP)"라고 말하며, 이 노래가 자기 작품이라고 사인하는 듯 만든 소리를 뜻한다.

김벌래는 브랜드의 시그니처 사운드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1960년대부터 등장한 종근당의 '댕~'하는 종소리가 바로 김벌래 작품이다.

'트라이 광고'하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쾅' 소리도 김벌래가 만들었다. 1990년, 배우 이덕화(디에이와이엔터테인먼트)가 연인이 닫아버린 문을 손바닥으로 쾅 때리며 낸 그 소리다.

사실 이 소리는 신발 브랜드의 요청으로 만들어 놨는데 광고주가 회사 망해서 문 닫는 소리 같다며 거절했다. 이 소리가 쌍방울 속옷 브랜드 트라이의 광고로 갔다.

김벌래는 2007년, 자신의 블로그에서 "(광고)주님에게 퇴짜 맞고 폐기해야 했던 내 분신이자 자식 같은 소리가 트라이로 갔다. 소리가 이덕화 연기에 딱 맞아떨어질 때 전율을 느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 '레전드' 광고 소리를 만든 김벌래는 홍익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로 제자를 양성하다 재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오늘날 광고 소리를 듣고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기술이 발달한 현재, 그가 ASMR 광고를 만든다면 더 실감나는 소리를 들려주지 않았을까. 하늘에 있는 그에게 인터뷰 질문을 던지며 상상해 본다.

 

※ 참고 자료
- 도서 '제목을 못 정한 책', 김벌래, 순정아이북스, 2007
- 블로그 '김벌래의 확 까발린 소리인생'
- 기사 '"콜라 병 따는 소리, 콘돔으로 만들었죠"',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2007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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