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턴트맨이 높은 건물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고, 그 위로 '세로 시네마'라는 글자가 세로로 적혀 있습니다. 사진 애플

[AP신문=하민지 기자] 영화 '위플래쉬'와 '라라랜드'로 유명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신작 '스턴트맨'을 공개했습니다. 9분 16초짜리 단편 영화입니다.

사실 이건 영화 형태의 광고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로 제작된 광고를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광고'라고 합니다. 광고주는 글로벌 기업 애플입니다. 셔젤 감독은 아이폰11 pro만 가지고 이 영화 같은 광고를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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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으로 영화 같은 광고를 찍은 감독은 셔젤 감독이 처음이 아닙니다. '올드보이', '아가씨'를 연출한 박찬욱 감독이 처음입니다. 박 감독은 2010년, 아이폰4로 '파란만장'을 촬영했습니다.

이처럼 처음은 아니지만 셔젤 감독의 신작이 주목받는 이유는 '세로형 영상 광고'이기 때문입니다. 애플은 이 광고에 '세로 시네마'라는 말을 붙여 홍보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원에서 영화학을 전공했는데요, 약 10분에 달하는 '스턴트맨'을 여러 번 돌려 보다 보니 몰랐던 세로형 영상 광고의 장점을 알게 됐습니다.

먼저 광고 해석부터 하고 그다음 세로형 영상 광고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스턴트맨이 거쳐간 다양한 영화들. 사진 애플

평생 엑스트라만 하던 스턴트맨,
위기의 순간에 주인공 되다

광고는 한 스턴트맨이 옥상에서 떨어지며 시작합니다. 그런데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스턴트맨은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는 눈을 감고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스턴트맨 인생을 돌아봅니다.

필름이 휘리릭 지나가는 장면 이후부터 스턴트맨의 과거 회상이 시작됩니다. 그는 무성 영화, 모험극, 서부극, 로맨스, 액션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했습니다. 몸을 다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을 주인공 대신 연기했습니다.

스턴트맨이 출연한 영화들을 잘 보면 셔젤 감독이 유명한 영화를 패러디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영화 장르를 잘 따라하기도 했습니다.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고물 자동차'라는 흑백 무성 영화의 경우 1900년대 초반 러시아 영화의 기법을 차용했습니다. 중간중간 까만 배경에 큰 흰색 글씨로 자막이 등장하는 게 러시아 영화의 기법입니다.

다음 영화인 '어둠 속의 사원'은 모험극 '인디아나 존스'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이 이후로 패러디가 쭉 이어집니다. 서부극 촬영지로 유명한 미국 애리조나주의 세도나시(市)에서 '세도나의 결투'를 촬영했습니다. 여성 한 명을 두고 두 남성이 총격전을 벌이는, 흔한 서부극 장면이 이어집니다.

로맨스 장르인 '무도회에 간 데이지'에서는 스턴트맨이 '사랑은 비를 타고'의 춤 동작이 연상되는 춤을 춥니다. 마지막 '푸른 그림자'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패러디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패러디가 이어지는 내내 스턴트맨과 한 명의 여자 주인공이 나옵니다. 스턴트맨은 그와 데이트하거나 키스하기 직전에 남자 주인공으로 교체됩니다. 그래서 늘 아쉬워했습니다.

스턴트맨의 과거 회상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옵니다. 높은 건물 아래로 떨어지며 '이제 죽는구나' 할 때, 스턴트맨이 늘 바라보기만 했던 여자 주인공이 빠르게 내려와 낙하산을 펴고 그를 구해줍니다. 둘이 키스하며 광고는 마무리됩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인스타그램 스토리, 틱톡, 유튜브 세로 광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경우 상단에 가로가 긴 이미지를 넣고 그 밑에 여백을 남겨 자막을 삽입했습니다. 틱톡은 세로 화면 전체를 활용했지만 영상이 아니라 이미지입니다. 유튜브의 경우 현대카드가 앱 구동화면을 보여주며 세로형 영상 광고를 시도했지만 위아래로 여백이 남아있습니다.

세로형 동영상 광고의 새 장 열렸다

세로형 영상 광고는 그동안 인기가 많이 없었습니다. 2018년, 많은 미디어가 세로형 콘텐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만 해도 이제 세로형 콘텐츠가 대세일 거라는 관측이 우세했습니다. 세계 최대 동영상 채널인 유튜브도 2018년에 세로형 광고 상품을 출시하면서 세로형 광고의 전망은 밝은 듯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가로가 긴 4:3, 18:9 비율에 최적화된 유튜브 광고의 아성이 무너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미지, 영상 등 콘텐츠 바이럴에 최적화 된 인스타그램은 1:1 정사각형 비율이라 세로형 영상 광고가 설 플랫폼은 부족해 보입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 페이스북 스토리, 틱톡 등 세로형 광고 전용 플랫폼이 있긴 하지만 셔젤 감독의 영화처럼 장초수 광고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10초 내외로 짧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세로형 광고는 이렇게 제작됐습니다. 첫째, 상하 여백에 아무것도 없게 해서 인스타그램 정사각형 비율이나 유튜브 4:3 비율에도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세로형 광고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둘째, 앱 광고가 스마트폰 앱 구동 화면을 보여줬습니다. 셋째, 영상이 아니라 세로가 긴 이미지로 제작됐습니다.

이처럼 세로형 광고는 세로 화면을 다 활용하지 않거나 활용하더라도 이미지로만 제작돼 왔습니다. 하지만 셔젤 감독은 세로형 동영상 광고를 어떻게 만들면 되는지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1. 인물의 얼굴을 화면에 꽉 채우는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의 경우, 피부 고민과 관련된 '트러블 케어' 마케팅을 하는 뷰티 브랜드가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얼굴은 모두 세로가 길기 때문입니다.

2.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보여주는 전신샷의 경우 패션 브랜드가 활용할 수 있습니다.

3. 셔젤 감독은 머리 위 여백을 많이 남겨 자막을 삽입했는데요, 광고에서 야외 풍경을 강조하는 여행ㆍ숙박 브랜드가 활용해 볼 수 있습니다.

4. 셔젤 감독처럼 화면 내에서 앞부분은 가깝고 뒷부분은 멀고 깊게, 즉 원근감을 살려 촬영한다면 아파트ㆍ호텔 브랜드가 건물의 내ㆍ외부를 공간감 있게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로형 동영상 광고는 아직 낯설지만 이처럼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매일 많은 틱톡 유저가 세로로 영상을 촬영하고 있으니 세로형 영상이 마냥 낯선 것만은 아닙니다.

모두가 셔젤 감독처럼 고퀄리티의 영상 광고를 찍을 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턴트맨'을 보고 나니 기존의 4:3 비율 화면에서만 고안하던 영상 광고를 세로 화면에서도 고안해 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턴트맨' 이후로 틱톡과 인스타그램, 유튜브에 다양하고 창의적이며 기발한 세로형 영상 광고가 생겨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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